모로코(Morocco)는 이국적 신비로 가득한 나라예요. 아프리카에 속하지만 유럽적 색채가 진하고, 북아프리카, 특히 마그레브 토착 유목민 베르베르인의 발자취를 품은 문화와 이슬람교를 기반으로 한 정체성은 모자이크처럼 다채로운 매력을 뿜어냅니다. 그 가운데 마라케시(Marrakesh)는 가장 모로코다운 도시로 알려졌어요. 베르베르어로 ‘신의 땅’이란 의미를 지닐 만큼 모로코의 역사와 문화, 예술이 집약된 천년 고도죠. 모로코라는 국명도 마라케시의 영어 발음에서 유래했어요. 고층 빌딩이 즐비한 신시가지가 비교적 낯익은 풍경이라면, 거대한 붉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 메디나(Medina)는 낯설지만 고풍스럽고 강렬한 멋이 넘쳐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마라케시 메디나는 출입문이 20개나 있을 만큼 방대한데요. 모로코의 전통 가옥인 리아드와 전통시장(수크), 이슬람 사원 모스크가 비좁은 붉은 담벼락을 따라 미로처럼 이어져요. 마라케시의 영혼 격인 유서 깊은 제마 엘프나(Jemaa el Fna) 광장과 전통 가옥을 개조한 으리으리한 호텔과 카페 역시 보물 같은 존재. 안타깝게도 2023년 지진으로 메디나 일부가 무너져 피해를 입었지만, 여전히 현지인과 관광객으로 북새통을 이룹니다.
쿠투비아 모스크(Koutoubia Mosque)는 마라케시의 상징적 장소이자 도시의 나침반 같은 존재예요. 안테나처럼 삐쭉 솟은 높이 77m 미너렛(첨탑)을 찾으면 금세 무뎌진 방향 감각이 되살아나죠. 모스크에서 5분쯤 걸어가면 혼돈의 또 다른 세상과 마주하게 되는데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제마 엘프나 광장입니다.
11세기에 세워진 제마 엘프나 광장은 거대한 시장이자 모로코의 풍부한 문화유산을 선보이는 무대예요. 낮에는 가판대 가득 바싹 말린 동물의 사체나 허브, 향신료 등을 판매하는 약초꾼부터 정교한 손놀림으로 몸에 그림을 그리는 헤나 장인, 우산 아래 타로 카드를 펼쳐놓고 운세를 점치는 점쟁이를 비롯해 챙이 넓은 화려한 모자와 놋쇠 컵을 둘러메고 물을 파는 물장수와 기이한 포즈를 척척 해내는 곡예사, 화려한 전통의상을 입고 악기 연주에 몰두하는 그나우아(Gnaoua) 연주자를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거예요.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든 곳엔 익살스러운 표정과 몸짓을 섞어가며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재담꾼이 있어요. 스토리텔링은 제마 엘프나 광장의 오래된 전통이자 모로코 구전 문화의 유산이죠. 현지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이야기에 푹 빠진 청중의 표정과 반응에서 얼마나 흥미진진한 이야기인지 느껴집니다.
제마 엘프나는 메디나의 중심으로, 광장과 이어지는 골목마다 미로 같은 시장이 펼쳐져요. 마라케시 전통시장인 수크(Souk). 좁은 길을 따라 온갖 점포가 늘어서 있죠. 모로코 하면 떠오르는 질 좋은 가죽 제품과 헤아릴 수 없이 다채로운 향신료, 솜씨 좋은 장인의 손길로 만든 수공예품, 모로코 전통 찜 요리 타진을 담아내는 도기 등 시장만 둘러보기에도 몇 날 며칠이 부족할 듯합니다.
마라케시에 밤이 찾아오면 제마 엘프나 광장은 요술 램프 속 지니가 마법을 부린 것처럼 낮과는 전혀 다른 풍경으로 변해요. 해가 기울수록 많은 사람의 웃음소리, 상인의 고함 소리, 연주자의 음악 소리가 점차 커지죠. 우리네 먹자골목처럼 요란하고, 야시장처럼 활기 넘치는 모로코 요리의 향연이 펼쳐지는데요. 모로코식 소시지와 다양한 고기를 굽는 통에 고소한 기름 냄새와 매캐한 연기가 광장을 가득 채우며 사람들의 식욕을 돋웁니다.
광장을 메운 인파를 벗어나 근처 옥상 테라스를 오르면 노을 지는 순간부터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밤까지, 제마 엘프나 광장의 가장 아름다운 한때를 포착하기 좋아요. 르 그랑 발콩 뒤 카페 글라시에(Le Grand Balcon du Café Glacier)와 카페 아르가나(Café Argana), 카페 드 프랑스(Café de France)는 광장의 멋진 뷰를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명소. 음식 가격이 다소 비싸지만 전망이 훌륭해 방문할 가치는 충분하답니다.
비틀스, 롤링 스톤스, 이브 생 로랑,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 당대 내로라하는 유명인에게 마라케시는 영감의 원천이었어요. 감각적인 모로코 예술의 정점에는 건축이 자리하죠. 북아프리카 특유의 대담하고 화려한 색채와 이슬람 건축양식의 특징인 복잡하고 정교한 아라베스크 문양이 어우러져 모로코만의 건축 스타일을 완성합니다. 특히 타일 공예의 일종인 젤리지(Zellige)는 모로코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특징 중 하나. 고대 도시 페스(Fez)에서 나는 천연 점토를 이용해 장인이 일일이 색을 입혀 만든 테라코타 타일을 잘게 쪼개 다양한 패턴을 완성하는 젤리지는 놀랍도록 섬세하고 정교한 모로코 건축의 핵심 요소랍니다. 마라케시를 대표하는 모로코 건축의 백미로는 다르 엘 바샤(Dar el Bacha)와 벤 유세프 마드라사(Ben Youssef Madrasa), 바히아 궁전(Bahia Palace), 마조렐 정원(Jardin Majorelle)을 꼽을 수 있어요.
‘커피계의 에르메스’로 불리는 싱가포르 대표 커피 브랜드 바샤 커피의 모티프가 된 다르 엘 바샤는 15세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유명 정치인과 예술계 인사가 최고급 아라비카 커피를 마시며 교류한 커피하우스로 명성이 자자했던 곳이에요. 2019년 리노베이션을 거친 끝에, 모로코 건축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재탄생했죠. 정사각형 중앙을 둘러싼 방 6개는 장인이 한땀 한땀 조각한 나무 천장과 다채로운 타일로 조성되어 모로코 예술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이곳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체험 중 하나는 바샤 커피를 맛보는 것. 옛 커피하우스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타일로 꾸민 다르 엘 바샤는 마라케시 핫 플레이스로 인기가 높아 오전 10시 오픈 시간에 맞춰 갈 것을 추천해요.
마라케시에는 세계적인 패션 아이콘 이브 생 로랑이 영면한 마조렐 정원이 있어요. 관능적인 파란색 건물, 거대한 선인장과 야자수, 분홍색 부겐빌레아로 가득한 정원에서는 이브 생 로랑과 그의 파트너 피에르 베르제의 감각적 영감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마라케시 최고의 포토존으로 사랑받는 장소인 만큼 관람객의 옷차림은 하나같이 패션쇼를 방불케 할 만큼 화려해요. 마조렐 정원을 둘러본 후 근처에 자리한 이브 생 로랑 뮤지엄도 꼭 찾아보길 추천해요. 40년 가까운 그의 디자인 인생을 총망라한 진귀한 아이템 1,000여 점이 전시돼 있는 곳이에요.
마라케시는 환상과 실상이 묘하게 중첩되어 그 경계가 흐릿하게 지워진 도시 같아요. 미로처럼 얽힌 좁다란 골목과 광장에는 <아라비안나이트>에 버금가는 기상천외한 이야깃거리가 부유하죠. 보고도 믿기 힘든 신비하고도 놀라운 이야기가 여전히 베일 뒤에 가려진 채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답니다.